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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문화 이해

신구약성서연구/선교신학

by James S. S. Jung 2009. 3. 26.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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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 606: Intercultural Communication
- 타문화 이해 -

Instructor: Dr. Frederic W. Bush/ Sin-Sub Jung

1. 도입
1) 강의 목표
(1) 팔레스틴 지역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연구에 있다.
(2) 이 공의와 평화를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준하여 생각하는데 있다.

2)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의 문제에 대한 대안
Palestine과 Israel의 대립은 23년 동안 매우 격심해진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4년 전 Fuller에서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그 후 몇 개의 기관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물론 이 기관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안에서 사회의 정의와 평화에 대하여 일하고 연구하는 기관이다.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의 문제(Issue)를 성경학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문제의 연구에는 두 가지 전제가 주어진다. 첫째는 역사학적 면이나 정치적인 힘의 견해에서 다루고 싶지 않다는 점이다. 오직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신앙에서 다루고 싶다. 이 공동체는 예수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공동체의 사람들 곧 성경을 중심으로 믿고 생활하는 공동체를 말한다. 둘째는 이 문제에는 성경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이 관련되어 있다. 교회가 교호의 정의로서의 공의와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데 있다. 평화를 만드는 자는 복이 있다. 미가6:8에서 미가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말할 때 사람을 사랑하고 공의를 베푸는 일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구절을 통해서 공의와 정의 그리고 평화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하나님이 믿는 자로부터 요구하시는 것이 곧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이 모세와 그의 백성들과 함께 언약을 맺는 장면이 있다. 이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지켜야할 규례와 계명에 대한 것이다. 이 언약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구절은 곧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 언약은 곧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을 말한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 그리고 모세의 출애굽을 거쳐 여호수아 시대에 성취된다.
샌더슨 박사는 성경이 있어서 두 개의 커뮤니티를 말하고 있다.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초대교회 교인들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a. 우리가 누구냐? 하는 신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신앙생활의 스타일 즉 어떻게 순종하느냐에 대한 질문의 해답이 주어져야 한다. 이것은 예배와 신앙생활양식과도 관련되어 있다. b.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신분에 대한 것이며 또한 무엇을 해야하는가? 라는 실생활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2. 성경을 읽는 자세
1) 성경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록된 당시의 기술로서가 아닌 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즉 고전 문서가 아닌 현대화된 면에서 보아야 한다. Text 자체에 대하여 샌더슨은 모세가 모압 광야에서 2세대에게 말한 것에서 찾고 있다. 모세는 2세대를 가리켜 호렙산에서 우리와 함께 언약을 맺으셨다 라고 언급한 것에서 찾았다.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즉 첫 세대가 아닌 2세대를 가리켜 그 언약의 대상임을 언급하고 있다. 첫 세대는 불 신앙으로 광야에서 다 죽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은 현세대의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오래 전 시대에 기록되었으나 그 이야기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다.

2) 성경은 우리의 신분을 비추는 거울로 보아야 한다.
이 말은 곧 인간의 윤리로 보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주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a. 우리가 누구인가? b.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을 찾는 Text가 되어야 한다. 샌더슨 박사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신분을 찾을 수 있는 거울로 성경을 읽어야지 윤리적인 모델로써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성경을 윤리적으로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정경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한 것이다. 인간에게서는 정경성에 대하여 찾아 볼 수 없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죄의 문제, 불 신앙은 또 다시 초대교회 신자들의 문제이기도 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아브라함은 자기의 목숨을 위하여 사라가 아내가 아닌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사라는 이삭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웃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야곱 역시 거짓말하는 자요 도적질 한 자였다. 모세 역시 정의를 위하여 살인하게되었고 도망한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쓰임 받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머리가 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을 볼 때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의 구원계획 속에서 사용하시면서 그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가장 최고의 자비에 대한 예를 찾기 위해 성경을 찾아보고자 한다.
출19~24장에 대한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의 언약을 체결하실 때 극적인 기적을 통하여 출애굽 하시는 하나님은 a)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이야기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율적으로 그리고 자비하심을 가지고 구원해 주시는 대상이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 가셨다 라고 표현될 수 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넌 후에 이제 광야를 걷게 된다. 시내광야에 이를 때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이야기하게 된다. 이것이 너희에게 주시는 계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애굽에서 너희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를 보라고 하신다. 내가 너희를 독수리의 날개 아래 품어 여기까지 인도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너희가 나의 계명을 다 지켜 행하면 너희 민족들 가운데 가장 귀한 백성으로 남을 것이다. 너희가 나의 왕국에서 제사장이 될 것이며 나의 백성들이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이 지켜야할 계명이 곧 출21:1-17에 있는 십계명이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명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풍성하게 담긴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계명을 보면 두 번째 답을 주고 있는데 b)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되는가? 하는 답을 주고 있다. 그것은 곧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십계명에 대하여 연구한 경험들이 각각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출21~23장을 가지고 연구해본 경험은 아마 없었을 것으로 본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백성을 통해서 백성에게 극적인 자비로움을 Ex하라는 요구가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보여 주어야할 질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있는 법들을 보면 경우에 따른 법이라 볼 수 있다. 그 어떤 경우에 어떤 벌칙이 따르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만약에 어떤 죄를 범하게 되면 어떠한 형벌이 있을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보면 사회성이 조건에 의하여 매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법령들을 보면 B.C. 2,500 전에 당시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법령들과 상당히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율법들을 보면 근동 지방에 살고 있는 다른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법들과 비슷한 것을 이스라엘민족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런 법들과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출21:1~22:7이 곧 경우에 따른 법이다. 그런데 출22:18~23:19까지는 다른 경우의 법들임을 알 수 있다. 출22:18~23:19에는 어떤 조건이 없는 그러한 요구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이것을 해야 한다. 아니면 이것을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법을 보게되면 사회적인 질서에서 조금 벗어난 것을 보게된다. 그 때 당시 이러한 법이 사회적인 풍습이나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법을 보면 어떤 사회적인 풍습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해서 이 법들이 생겨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사랑과 정의의 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법들이 사회적인 면에서 질서를 세우거나 체계를 세우는 법들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신 사랑에 의하여 이 사화를 화목하게 하는 목적에서 이 법이 주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법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심에 대한 생각과 자세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난 섭리와 역사는 억압을 받은 자, 마음의 상심을 입은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통하여 사회의 소외계층, 상처 입은 심령, 깨어지기 쉬운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르쳐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이 법은 고대 족장시대에 있어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법을 가지고 지킬 때 그 사회의 질서와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이방인, 과부, 고아, 소외계층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좀더 구체화시키기 위해 사랑이라는 것에 조금 더 집중해 보고자 한다.
고대문화를 보면 '이방인'은 대체로 노예로 팔려온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외국인을 보면 가족의 구성이 보통 사람보다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가족 구성조직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쉽게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이러한 외국인들은 크게 관심을 받게 되었다. 출23:9을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고대사회의 노예생활을 보면 노예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예를 압박한다든지 억울하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다. 모세의 법을 보면 노예를 억압한다든지 노예를 부정당하게 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노예에 대하여 잘 대우하도록 한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신분이었던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노예였음을 상기시키는 것은 자기들도 노예였음을 깨닫게 함으로서 유대인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갖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너희가 노예들의 마음을 알아라"(NISB Trans), 이것은 곧 사람의 본질적인 면을 말한다. 상대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것을 앎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본질적인 면을 알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사랑을 베풀고 정의를 베푸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외국인들을 이해하고 자비를 베푸는 일에 있어서 자기들도 애굽에서 노예였음을 깨닫고 그러한 자세로 행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이 외국인을 볼 때 자신이 애굽 땅에서 노예였음을 생각하고 그 외국인을 대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심에 의한 구원을 베푸시는 것에 해당된다. 하나님의 정의, 공의와 사랑의 행위가 이스라엘공동체 안에 사는 이방인을 향한 새로운 일들을 하게 한다. 이스라엘공동체는 외국인의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회공동체 안에서 소외 받는 계층 곧 고아, 과부들에 대한 대우 역시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규를 보면 이스라엘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곧 사회적으로 불공평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소외 받는 사람을 위하여 존속해야할 사회임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읽고 들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 두어야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a)우리가 누구인가?, b)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 이 언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아직도 형성되지 않는 이 땅에 어떤 역사를 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한 경우를 볼 때 노예를 자유로운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우리가 세상과 관련지을 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곧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정의와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볼 때 실생활 가운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비와 사랑을 가지고 훈련하는 입장에서 살아가야 한다(야고보서). 규례, 법규를 볼 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자비로움과 사랑을 가지고 우리는 최고의 자비를 베풀며 살아야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고대 근동지방의 이슈를 보고자 한다.

3.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최고의 실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가지고 중동지역이 있는 어려운 상황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우리 세계를 보고 있을 때 누가 고아이며 과부가 되겠는가? 우리가 이 세상을 볼 때 누구에게 우리의 최상의 자비를 베풀어야 되겠는가? 오늘 강의를 통해서 가장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가혹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곳이 이 팔레스틴 지역이다. 이것을 지금 나의 경험을 통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Brandeis University에서 내가 근동지방의 역사에 대하여 학위를 받았다. 1964~65까지 그곳에서 가르쳤다. B.U.는 1947년도에 유대인들에 의해 세워진 학교이다. 그 후로는 장로교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나의 성장과정에서 유대인 친구는 하나도 없었고 대학교에 다닐 때도 없었다. 워싱턴대학교에 다닐 때 유대인을 초청한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나는 워싱턴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Brandeis University에서 유대인과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심오한 토론을 갖게 되었다. 구약에서 선지자에 의한 생각에서 감동을 받게 되었다. 유대인의 윤리(자유로운)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최선의 자비라든지 선을 행하는 것의 면모가 된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유대인들이 미국의 평화와 정의에 대하여 앞서가는 것을 보게 된다. 미국과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크리스찬 공동체 안에서 수백 년 간 모은 재산을 잃게 되고 수많은 핍박을 받게 된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에스더서를 보면 에스더에 의해서 구원을 받게 되고 그들의 적들이 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날을 유대인들은 축제일로 지내고 있다. 이것이 활발하게 축제일로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삶을 보면 유대인의 삶은 에스더에서 소개되는 유대인의 삶과는 상반된 삶을 보이고 있다. 유럽에 살고 있던 공동체를 보면 그들을 구원해 줄 어떤 인물이 없었다. 1881~1905년까지 특별히 러시아 안에 살고 있는 Pogram에 의해서 많은 핍박을 받게 된다. Pogram에 의해서 그들은 빈민촌에 살게되고 많은 핍박을 받게 된다. 이 Pogram은 러시아정부에서 만든 단체이다. 이러한 정책을 가지고 유럽사람이 아닌 다른 외국인들에 대해서 탄압정책을 썼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이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키는 곧 히틀러와 같은 인물을 낳게 되었다. 유럽에 살고 있었던 6~700만 명이 학살을 당하게 된다. 그것이 유럽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다 죽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유럽에만 초점을 둘 수 없다. 백인 우월주의는 미국 역시 많은 예가 있었다. 인종차별주의자가 있었다. 1530년에 그가 두 개의 법 조항을 만들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 오는 유대인들을 막게 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뉴욕의 항구에서 이민국원들을 만나게 된다. 유대인들은 이들로부터 유럽, 독일, 팔레스틴 지역으로 되돌아 가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1) The Palestinian Refugees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핍박을 받았던 유대인들, 만일 그들이 핍박을 받지 않았다면 시온주의라든지 시온주의자라는 말이 없었을 것이다. 더욱 아이러니칼한 것은 유럽이 초래햇던 엄청난 사건에 대한 그 값을 지금 팔레스틴 사람들이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팔레스틴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슬람이라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시온주의자가 일어난 40년 후에 나치가 유대인들을 혹독하게 핍박을 하게된다. 팔레스틴 지역에 들어온 시온주의자들을 보면 대개 평화스럽게 살고 있었다. 팔레스틴 지역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1947~1949년 사이에 75만 명의 사람들을 몰아내고 자기들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나는 1999년 8월에 기독교 미스메이커와 같이 함께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웨스트 뱅크 헤브론에 있게 되었다. 상당히 많은 커뮤니티에서 피스메이커를 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CPT-Hebron에 있을 때 Deheisheh Camp를 투어를 하는데 Atallah라 하는 사람에게 가이드를 받았다. 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캠프이다. 좁고 포장되지 않은 길이 있고 집들은 작고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페인트칠하지 않은 집들이 있었다. 상당히 밀착되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언덕에 보면 집이 있는데 아텔라라는 사람이 그곳에 데리고 갔다. 그곳에 집이 8피트와 10피트 되는 2개의 방이 있었다. 그 조그마한 방인데 47~49전쟁 이후에 상당히 많은 그 가족이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위치한 장소가 된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48년에 있었던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아직도 그곳의 자기 집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집들이 있지는 않았다. 다 없어진 것이다. 48년 전쟁 이후에 그곳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집들을 불도저로 다 밀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이 곳 뿐만 아니라 450개의 다른 지역에서 이와 똑같이 밀어버린 것이다.
지금 보면 약 170만 명의 사람들이 이 캠프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West Bank, Gaza Strip이라고 하는 곳에 위치한 30개의 캠프에서 170만의 refugees이 살고 있었다. 또 다른 refugees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Lebanon, Syria, Jordan에 살고 있다. 이 캠프들을 투어하고 난 다음에 느낀 것은 스스로 어떤 질문을 갖게 되었다. 그 질문은 이 유럽으로부터 핍박을 피하여 도망쳐 나온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었던 지역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그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것을 험악하게 빼앗은 것이다. 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75만 명의 사람들을 refugees 캠프로 쫓으면서 가지고 있었던 재산들을 빼앗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이스라엘 가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가수는 본래 자기 땅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그것은 "그들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팔레스틴 지역의 식민자들(refugees)에게 응용된다면 나찌의 피해를 입은 것처럼 그들도 그러한 경우를 당해야 된다라는 것이다. 이 정의란 것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곧 팔레스틴 지역의 refugees들에게 주게되는 영향이다. 그러나 Is이 돌아와서 팔레스틴 지역을 차지한다는 것은 곧 그곳에 사는 refugees들이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Conflict들로 인하여 평화조약을 맺는 것이 왜 힘드는가에 대하여 살펴본다.

4. The Oslo Interim Agreement in 1993~1995.
Fuller에 있을 때 74~75년에 안식년을 주었다. 그 때 Is에서 살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 지리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West Bank를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그 때 이스라엘백성들이 정복하여 살게 되었던 그 지역사람들에게 행했던 일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나는 Is백성들이 어떤 협약을 맺는다고 할 때 특별한 관심을 갖게된다. 1975~85년 사이에 곧 10년이 지난 후에 몇 개의 팀을 구성하여 고고학적인 연구를 위하여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이것을 연구하면서 Oslo Interim Agreements라는 것이 어떤 것이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47~49년 전쟁사이에 Is백성이 Gaza Strip, Sinai Peninsula, Egypt, the Golan Heights from Syria, the West bank from Jordan을 군사력을 통해서 점령하게 된다. 73~75년 사이에 이집트와 Is과의 평화조약을 통해서 돌려주게 된다.

1) The 1967 War - Israel's "Demographic Problem"
67년 전쟁 때 Is과 Palestine은 상당히 나빠지게 된다. 이것을 살펴보면 첫 번째 일어난 문제는 시온주의자들의 인구밀도에 그 원인이 있었다. 67년 전쟁 때 Gaza와 West Bank지역에 90만 명의 팔레스틴 사람들이 아직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48년 전쟁 이후 약 40만 명의 팔레스틴 사람들이 점령지역에 살고 있었다. Is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그곳에서 살수 있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에는 130만 명의 사람들이 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출생률을 보면 Is사람들보다 Palestine사람들의 출생률이 훨씬더 높다. 그렇게 될 경우 Is안에서 Is과 Palestine의 인구가 거의 비슷하게 될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를 볼 때 시온주의자들의 지도자들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안이 된 것이다. 이온주의자들은 항상 Is은 유대인들만의 나라였고 항상 유대인들의 나라가 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배웠던 경험들을 통해서 Is의 정책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 많은 의문점을 갖게 한다. 그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Palestine사람들을 쫓아내게 되는데 이러한 정치적인 견해와 사회적인 견해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를 보면 팔레스틴 사람들을 한 지역에 남겨두게 되는 경우를 초래하게 되었고 그 지역에는 상당한 무력이 행사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권리라든지 사회적인 진리에 대하여 서로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된다. 이러한 Is의 Occupation의 결과 보고자 한다.

2) The Expropriation of Lord and the Building of Settlements.
1967년부터 이스라엘 정부는 West Bank와 Gaza에 유대인들이 Settle할 수 있는 땅을 자꾸 만들게 되었다. 요단강 근처에 있는 지역에 먼저 Settle할 수 있게 했다. West Bank의 1/3과 예루살렘의 동부지역을 이스라엘사람들이 차지하게 된다. 1977년에 Likud라는 당이 일어났고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핵심이 되는 부분에 유대인들을 정착시키는 일을 하게 된다. 이러한 정책에 의해 1988년 West bank 52%이상 되는 지역과 Gaza Strip은 40%이상 되는 지역 Control하게 되었다. 1988년도에는 거의 67,000인구가 150개 지역에 유대인만이 살 수 있는 지역에서 살게 된다. Gaza의 남부 지역을 보면 14개의 유대인지역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2,500인구밖에 살지 않게 되었다. 1988년도에 기록을 보면 West Bank와 Gaza 지역에 살고 있었던 Palestine 사람들은 약 25%가 자신들의 땅과 재산을 잃게 되었다. 열심당과 보수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사람들만이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시온주의자가 아닌 또한 보수 정통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도 했다. 보통 유대인들이 정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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